W.F

2023

그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엇……” 학교 옥상에서, 막 뛰어내리려던 그 사람을 보고 선화가 처음 했던 생각은 뱉은 말만큼이나 단순했다. “거기서 함부로 뛰시면 안 돼요.” 넌 정말 무덤덤해. 늘 듣던 말 대로 그랬다. 하지만 대체, 그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처음 보는 사람을 걱정해주는 것도 그렇고, 처음 겪는 순간에선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

2023

꼭 비웃을 것만 같다. 누군가 내 속마음을 읽어낸다면. 그런 생각은 어릴 적부터 해온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였지만, 언제고 나를 부끄럽지 않게 한 적이 없었다. 그래. 난 부끄러웠다. 무엇 하나 특별한 게 없는 내가. 무엇 하나 드러낼 게 없는 내가. 그렇다고 언제라도 나를, 내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내겠다는 바람은 없었다. 단지, 조금 더 특별한 냄새와 ...

2023

사라, 너의 미소가 없는 삶은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액자 같아. 누구도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지. 사라, 부디 웃어줘. 세상의 모든 가엾지 않은 이름을 우표처럼 붙일게. 너의 한숨도, 속삭임도, 텃새처럼 곁에 있기를 바라며. 1 드디어 밀튼을 떠나. 세계의 끝.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곧 새로운 세계에 닿을 거야. 어때?...

사랑에 대한 우화1, 2018~2020

1 우울이란 것은 그 이름만으로는 그에 지배당한 사람을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감정에도 그림자가 있다면 그것을 모든 감정이 가진 그림자라고 할 수 있을 법했다. 달리 어떤 수단으로도 그 시간에서 쉬이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림자에 갇혔던 시간만큼 밝은 곳을 달려야만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는, 세상에 여지저기 널려있는 생각을 따르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하...

모기에 물렸다. 이번 해는 좀 늦었네 싶었다. 긁으면 긁을수록 아팠지만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나는 손을 떼지 않고 하얀 것이 벗겨지도록 살갗을 긁어댔다. 이내 피가 나자 나는 휴지를 찾아 살갗을 꾹 눌렀다. 우습지만, 차라리 내가 환자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원한 엄마를 따라 병원에서 산지도 몇 주째. 이곳의 모든 것이 익숙해지는 만큼, 나는 지쳐 ...

사랑에 대한 우화3, 2021

“싫다고 대답하면 바로 쏠 거야.” 그런 형편없는 고백에는 당연히, 아니 높은 확률로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왜 그렇게 당당하지. 어쩜 그렇게 자신감이 넘칠 수 있지. 그건 준향을 보면 늘 맘속에 가질 수밖에 없던 의문이기도 했다. 가장 오랜 의문. 제 존재에 대한 의문. 어쩌면 일맥상통할지도 모르는 그 오묘한 신비와 진실의 한가운데, 강물처럼 흐...

2021-2022

나는 예전부터 왜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식물인간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식물은 인간의 눈엔 가만히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세상과 가장 직접적으로 교류하고 엄청난 생명력을 내뿜으며 활기차게 움직이는 존재거든. 그래서 난 식물이 가장 좋았어. 말없이, 치열한 존재라서. 이런 말은 좀 우스울지 모르지만,...

2023

은해는 혼자 벤치에 앉아있는 주연을 바라보면서, 어쩐지 서글픔이 일었다. 이상하게 혼자서 주연을 응시하고 있을 때면 늘 그런 기분이 들었다. 허나 이유는 몰라도 그런 기분에 잠겨있는 자신이 좋다고 느꼈다. “여기서 뭐해?” “기다리고 있어.” “누굴?” 주연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 디지털 카메라 주인. 직사각형의 은색 카메라를 소중한 제 일부라도 되...

창문을 열면 바람이 마른 낯을 적실 듯 밀려왔다. 고르지 못한 길을 열심히도 다니는 느린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할 때면 그렇게 창문을 열어둔 채로 있는 걸 좋아했다. 바깥은 온통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고, 달은 때로는 둥글고 때로는 반쪽이고, 전봇대가 없이는 빛 한 줄기도 없는 그 길은 어째선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곤 했다. 그건 그 애도 마찬가지인지,...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건 온통 건물을 뒤덮은 간판들이었다. 제각기 색도 크기도 글자도 다르지만 개별성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그 표상은, 마주하기 전부터 벌써 그의 실체에 질리게끔 만들어버렸다.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다 알 듯한 기분으로 초조한 걸음을 옮기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세웠지만 기실은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걸음을 내디딜 ...

2020

문 없는 집에서 사는 삶은, 마침표 없는 문장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오가고, 보잘것없는 우리 사는 모양새는 꾸밈이라곤 없이 너무나 투명하고 숨길 수도 없이 모든 게 드러나 보이고, 밑 빠진 독처럼, 뭐가 들어오기만 하면 도로 빠져나가서, 아무것도 손에 쥔 것도 마음의 여백에 채울 것도 없는, 얇은 격자 창문으로 둘러싸인, 손 하나 겨우...